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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말무사 500화 - 야율초재

※ 야율초재에 관한 영문 위키피디아의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 야율초재


  - Yelü Chucai (한자 : 耶律楚材), 몽고어 Urtu Saqal" 긴 수염" 이란 뜻. 그의 이름은 여러가지 스펠링으로 알려져 있다. Yeh-Lu, Ye Liu, Yeliu, Chutsai, Ch'u-Ts'ai, etc.)  생망시기는 July 24, 1190 - June 20, 1244 이다. 야율초재는 거란족의 정치가로 요나라(遼) 왕족의 혈통이다. 그는 몽골제국 초기에 조언가이자 재상으로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는 몽골제국의 대외정벌 전략을 제안한 첫번째 신하이자, 징키즈칸과 그의 후계자 오고데이 칸 시절에 북중국에서의 통치 개혁을 시작하였다. 


  - 생애


  ○ 불경에 통달했고, 도교 의사이기도 했던 야율초재는 징키즈칸의 조언자로 가장 잘 알려져있다. 야율초재의 아버지인 야율 루는 금나라(주르첸)을 섬겼는데, 금나라은 1125년에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주르첸은 통일된 몽골 군대에의해 1211년에 정벌을 당하게 된다. 요나라와 주르첸의 저항세력이 몽골과 연합할 때, 1218년에 28살의 나이로 야율초제는 징키즈칸의 막료가 된다. 야율초재는 영광스럽게 베이징의 쿤밍 호수가에 매장되었고, 후에 칸의 여름궁전의 정원으로 이장된다. 


  거란과 몽골 그리고 남송은 그들의 공동의 적인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하여 연합한다. 이 사실은 징키즈칸이 한 말에 잘 나타난다. 7월말 경 사리평원의 오르도스에서 징키즈칸은 야율초재를 처음 만나는데, 이 때 징키즈칸은 "요와 금은 수세대에 걸쳐 서로 원수지간이었다. 내가 네 복수를 해주마" 라고 말했다고 하다. 야율초재가 대답하기를,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금나라를 성심을 다해 섬겼습니다. 어찌 제가 감히 금의 신하로써, 그리고 아들로써 제 주군과 아버지에게 역심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몽골사람들은 이 진실된 대답과 야율초재의 외모 (그는 매우 키가 크고, 위엄있는 수염이 허리에 닿았고 낭랑한 목소리를 가졌다고 한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징키즈칸은 야율초재에게 "Urtu Saqal(긴 수염)" 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그의 조언자중 한명으로 삼았다. 


  그는 정복한 민족을 수탈하는 대신에 세금의 거두도록 하는데 그의 최선을 다했다. 그루세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에 따르면, 오고데이 칸이 야율초재를 시험하는 내용이 나온다. "당신은 백성들 위하여 다시 눈물을 흘리겠는가?" 이 현명한 재상은 아직 야만적인 풍습에 젖어있는 징키즈칸의 아들이자 왕좌의 계승자인 오고데이에게 이 유명한 대답을 했다. "말 등에 앉아서 제국을 정복할 수는 있지만, 말 등에 앉아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북중국이 몽골의 침략에 굴복하는 동안 야율초재는 몇가지 정치(통치)개혁을 단행하는다. 예를 들면, 민정과 군정을 분리하고, 몇가지 세금과 관세를 도입한 것이다. 몽골군이 금나라의 남쪽 수도인 카이펑을 정벌할 때 거센 저항을 받았다. 이에대한 보복으로 카이펑을 초토화하고 거주자를 몰살시킬 것을 징키즈칸의 장수들이 제안했다. 그러나 야율초제는 카이펑을 통치하고 세금을 걷도록 징키즈칸을 설득했다. 그리고 카이펑 사람들 죽이는 대신에 그들의 뛰어난 재능을 몽골의 부를 늘리는데 쓰도록 명령하라고 했다. 야율초제는 6피트 8인치 (대략 2m 이상) 의 키에 허리에 닿는 수염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베이징의 쿤밍 호수에 묻혔는데, 그곳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사원)이 있다. 야율초재는 역사에 기록된 사람 중, 거란 말을 하고 거란글을 읽고 쓸 수 있었던 마지막 사람이다.